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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22일 임인 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과 함께 왜적에 대한 대책 등을 논의하다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왜적들이 이처럼 주둔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왜적이 강화(講和)를 핑계로 변방 고을에 주둔해 있으면서 여전히 약탈을 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가 진실로 그들의 술책에 빠진 것입니다. 김준민(金俊民)거제(巨濟)를 떠난 뒤부터는 왜적이 거제옥포(玉浦)·영등포(永登浦)·지세포(知世浦) 등의 섬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는데, 병선 만들 목재가 이 섬들에만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쉬면서 선척(船隻)을 많이 만들게 된다면 우리도 주사(舟師)가 있기는 하지만 사세가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수사(水使)들은 무재나 지략이 서로 비등하고 호령이 한결같지 못합니다. 원균(元均)의 군사 6백여 명과 이순신의 군사 1천여 명이 오랫동안 바다 위에 머무르고 있는 데다가 또 매우 굶주리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무너진다면 적군이 바다와 육지로 한꺼번에 몰려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달리 방어할 계책이 없습니다. 반드시 중국군과 합세해야 하는데 군량이 모자라니 매우 민망하고 염려됩니다. 여기의 경비(經費)로 한 해를 지탱하여 쓸 만한 수량을 정하여 10만∼20만 석쯤 요량해서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그곳으로 실어다가 군량에 보충하다면 일이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조발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각 고을들이 오로지 하리(下吏)들에게만 맡기고 있으므로 강장한 자는 뇌물을 주어 면하고 쇠약한 자만 뽑힙니다. 이번에는 노약(老弱)은 제외하고 정예(精銳)만 뽑아 3등급으로 나누어 부책(簿冊)을 만들고, 그 임시에 조발하여 압령(押領)하고 가서 교부(交付)하게 한다면 일시에 이르게 되어 전처럼 혼잡해지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실정이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뜻이 어찌 참으로 중국을 침범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소망은 조공(朝貢)의 길을 통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홍인상(洪麟祥)의 장계를 보건대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에 있는 적세를 모르고 단지 군사 5천만 유치시키고 모두 철수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왜적이 새 군사를 다시 조발하여 내년 봄에 대거 출동하게 된다면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모름지기 겨울 이전에 유 총병(劉總兵)과 합세하여 소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 총병은 단지 파수(把守)하라는 명만 받았으므로 비록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형세가 있다 하더라도 송 경략(宋經略)의 명령이 없으면 반드시 진격하지 않을 것이다. 대저 여기의 사정을 반드시 중국 조정이 환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인데, 송 경략이 ‘진주(晉州)를 비웠으므로 왜적이 들어가 점거하였다.’고 석 상서(石尙書)에게 거짓 신보(申報)했고, 모든 주문(奏聞)도 번번이 막아 저지하고 있으니 그의 마음가짐과 행사가 매우 가슴 아프다. 대신(大臣)으로서 처사가 이러하니 천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본(奏本)은 되도록 완곡(婉曲)하게 만들어 왜적이 물러가지 않은 것과 우리 나라의 급급한 정세를 갖추어 자세하게 개진해야 한다. 또 좋은 말로 주선해 가는 것이 합당하다."

하니,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중국의 서울이 연경(燕京)이므로 우리 나라는 곧 번리(藩籬)가 됩니다. 이번에 왜적이 중국을 업신여겨 번리를 무너뜨리고 있으니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하는데 도리어 조공(朝貢)의 봉상(封上)을 의논하고 있으니 이는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옛부터 제왕이 융적(戎狄)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고 가는 자는 붙잡지 않았을 뿐이요, 왕(王)으로 봉하여 악한 짓을 더하게 한 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는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의 묵돌(冒頓)이나 당(唐)나라 때의 돌궐(突厥)이 극도로 날뛰었었지만 모두 천토(天討)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방법은 기미(羈縻)495) 할 뿐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잘못이다. 이래서 화의(和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었기 때문에 대강 수로(水路)를 알고 있는데, 제주에서 중국 강남(江南)을 가려면 매우 멀지만 전라도에서 요동에 가기는 매우 가깝습니다. 만일 호남(湖南)으로 해서 바로 요동을 침범한다면 누가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이 말이 사실인가? 서북(西北)을 경유하지 않고도 요동에 갈 수가 있는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반드시 먼저 우리 나라를 얻어야 수로와 육로로 병진(竝進)할 수 있습니다."

하고, 도승지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왜적들이 변방 고을에 주둔해 있으면 비록 촌보(寸步)를 움직이지 않더라도 우리 나라는 저절로 잔파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강(漢江) 이남에 왜적의 진지가 별이나 바둑돌처럼 벌려 있어 수미(首尾)가 서로 잇닿아 있기 때문에 한 군영을 범하면 금방 호응하는가 하면 높은 곳에는 으레 요새(要塞)를 만들었으니 지형을 잘 알았다고 하겠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원주(原州)·지평(砥平)·양근(楊根)에는 수어(守禦)할 만한 곳이 매우 많고, 광주(廣州)남한 산성(南漢山城), 수원(水原)독성(禿城), 금천(衿川)금지산(衿之山)은 모두가 특이한 요새로 된 데이어서 여기를 지키면 호남(湖南)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경기 방어사(京畿防禦使)를 차출하여 광주·이천(利川) 등지의 군사를 취합하여 서울을 방어하게 해야 합니다. 변응성(邊應星)이 무사(武士)들 중에서는 좀 우수하니 방어사에 차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엄하게 군율(軍律)을 밝혀 눈물을 흘리면서 참형(斬刑)한 경우도 있었다. 최영(崔瑩)이 장수가 되어서 군율에 관계된 죄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졸들이 모두 사력을 다 바쳤다. 왜적은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비록 소소한 죄라도 반드시 참형에 처하기 때문에 그 군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달려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죽을 땅에 나아가 적세를 꺾으면서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우리 나라는 군율이 엄격하지 못하였는데 사변이 생긴 뒤에는 더욱 해이되었다. 군율을 범하여 응당 죽여야 할 사람들을 비변사가 하나도 법에 의해 논단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비록 무장한 군사가 백만이 되고 군량이 10년을 지탱하게 된다 하더라도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옛사람들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으면 손상되는 바가 매우 많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죽인 것이다. 박홍(朴泓)은 경상 수사(慶尙水使)로서 진(鎭)을 버리고 평양으로 왔는데도 죄를 주지 않았고, 봉강(封彊)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봉강에서 죽어야 하는 법인데 경상도의 수령들이 피신하여 북도(北道)로 들어온 사람이 있기도 하니, 진실로 경악스러웠다. 이번 진주(晉州) 싸움에는 적세가 호대하여 전과는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에 아군의 형세로는 막아내기 어려울 듯하였다. 그러나 장수는 마땅히 군세를 드날리며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다했어야 하는데 끝내 한 사람도 달려가 구원한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유사(有司)가 군율대로 하지 않았고 대간 역시 논집하지 않았으니 군율을 범한 장수가 어떻게 징계되겠는가. 당초 경상도에서 군율을 범한 장사(將士)들은 경중에 따라 죄를 다스렸어야 했다."

하니, 사간 이시언(李時彦)이 아뢰기를,

"이는 모두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고 사정이 너무 성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엄하게 군율을 밝히려면 반드시 위에서 한편에 치우치는 마음을 제거하고 공도를 회복한 다음에야 백료(百僚)들이 힘쓸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군율은 반드시 부오(部伍)를 정하고 약속(約束)을 엄하게 하여 삼령 오신(三令五申)496) 으로 정예롭게 훈련시킨 다음에야 호령이 행해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태평한 시대가 오래여서 무장들이 용병에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졸들이 전진(戰陣)이 무슨 일을 하는 데인지도 모르는데, 창졸간에 싸움에 나가게 했으니 이는 마치 양떼를 내몬 것과 같습니다. 이빈(李薲)·권응수(權應銖) 등의 경우도 군사를 통솔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마치 풀을 베듯이 사졸들을 죽였습니다. 이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더욱 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청사(奏請使)로는 누가 합당하겠는가? 최입(崔岦)이 어떻겠는가?"

하니,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최입이 글을 잘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만 임기응변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최입의 품계를 더 올려 보내도록 하라. 이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니 비록 저지당하더라도 죽기로 기약하여 기필코 주달할 것이요, 중로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일러서 보내라. 자문(咨文)은 밖에서 의논해서 정하라. 옛사람들도 기초하는 사람이 있고 윤색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일을 중히 여겨서였던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을 점말(點抹)하기를 난처하게 여기는데, 사명(辭命)497) 은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왜적을 방어하려면 화포(火砲)가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데 화약을 조처하기가 어렵다. 중국에서는 바닷물을 달여서 만들어낸다고 했다. 앞서 정주(定州)에 있을 때에 시험삼아 달여서 만들어내도록 하고 잘 만드는 사람은 당상(堂上)으로 올려 제수하도록 하여 방(榜)을 걸어 알렸지만 잘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화약을 풍족하게 쓸 수 있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화약에 대한 일은 아주 용이합니다. 중국의 방법은 세 차례 말리고 다섯 차례 식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네 차례 말리고 두 차례 식히는데, 쉬는 날이면 으레 나무를 베어 염초(焰硝)를 굽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화약이 저절로 많아질 것입니다. 또 강화(江華)에 목자(牧子)들이 많이 있지만 별로 맡아보는 일이 없으니, 감목관(監牧官)으로 하여금 거느리고서 굽게 함이 합당합니다."

하고, 완성군(完城君) 이헌국(李憲國)은 아뢰기를,

"중종조(中宗朝)에는 염초를 방납(防納)498) 하였는데 값을 주고 모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었고 무역(貿易)하기도 매우 어려우니 도성 사람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굽게 함이 가합니다. 또 과거(科擧)에도 조총(鳥銃)으로 시취(試取)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이미 생각해 보았다. 목전(木箭)499) 은 긴요하지 않으니 대신 조총(鳥銃)으로 시험보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생원 진사의 초시(初試) 때 겸하여 무재(武才)도 시험하게 할 일을 두세 번이나 전교하셨기 때문에 비변사가 시험삼아 시행하겠다는 뜻을 상달했습니다마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들 합당하지 않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생원 진사시에서 시취한 사람들은 모두 유약한 사람들이어서 무재를 익히게 한다면 이로 인해 본업(本業)을 폐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고, 이헌국이 아뢰기를,

"우림위(羽林衛)는 우리 나라의 정병(精兵)이어서 그 가운데 반드시 효용(驍勇)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지난해 서북(西北)으로 행행(行幸)하실 적에 이들이 싸움에 나아가기도 하고 호위(扈衛)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모두 흩어지고 없습니다. 명종조(明宗朝)에는 서얼과(庶孽科)가 있었으니 이에 의해 과거를 보여 서울에 집합시켰다가 위급할 때 쓰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도 서얼을 허통(許通)시키고 공사천(公私賤)을 양인(良人)이 되게 하면 상인(常人)들이 모두 무재를 익히게 될 것이고 생원 진사시에도 시험을 보이면 양반(兩班)도 모두 무재를 익힐 것으로 여겨진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는다 하더라도 일본은 곧 우리 나라와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원수인데 이런 때에 어떻게 다시 전의 규정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듣건대 경상도의 풍속은 누구라도 아들 형제를 두었을 경우 한 아들이 글을 잘하면 마루에 앉히고 한 아들이 무예를 익히면 마당에 앉혀 마치 노예처럼 여긴다니, 국가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게 된 것은 경상도가 오도(誤導)한 소치이다. 옛적에 육상산(陸象山)은 자제들에게 무예를 익히게 했고 왕양명(王陽明)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한다. 우리 나라는 책자(冊子)만 가지고 자제들을 교육하므로 문무(文武)를 나누어 두 갈래로 만들어 놓았으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하니, 이헌국이 아뢰기를,

"어세겸(魚世謙)이나 정난종(鄭蘭宗)은 모두 한때의 명사(名士)였는데도 공무(公務)에서 물러 나오면 매양 모화관(慕華館)에서 말을 달렸었으니, 조종조의 인물들은 오늘날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인물이 조종조와 달라서이겠는가. 습속이 다른 탓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기사(騎射)할 때 과녁을 말의 배 밑에 설치하고 굽어보며 쏘는데, 적이 어찌 말의 배 밑에 숨겠는가. 이제 기사는 없애고 대신 추인(芻人)500) 으로 시험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공조 판서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기사는 말달리기를 익히는 것뿐이니 상의 분부대로 추인으로 시사(試射)하는 것이 또한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조령(鳥嶺)을 차단한 다음에야 충주(忠州)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유 원외(劉員外)를 만났을 적에 ‘조령을 방어하지 못하면 서울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했었다. 적들이 먼저 점거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면 이는 조령 이남을 적에게 주어 버리는 것이니, 조령에 관문을 설치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관문을 설치하는 것이 매우 합당합니다. 추풍령(秋風嶺)·죽령(竹嶺)황간(黃澗)·영동(永同) 등지에도 모두 관문을 설치해야 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에 조령의 요해처에 웅거하여 복병(伏兵)을 배치하였더라면 적이 어찌 감히 쉽게 진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적들이 지금 영남에 주둔하고 있지만 사세가 관문을 다 설치하기는 어려우니 조령에만 설치하고 우선 행인들을 기찰(譏察)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포루(砲樓)를 해주(海州)에다 설치하고 싶은데 제도가 어떠한지를 모르겠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이 용산창(龍山倉)에다 포루를 설치했었는데 대체로 연대(煙臺)의 제도와 같았고, 또 《기효신서(紀效新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 밖의 둘레에 양마장(羊馬墻)처럼 담을 쌓되 상부에는 대총통(大銃筒)의 구멍을 뚫고 하부에는 소총통의 구멍을 뚫는데 천 보(步)에 하나씩 설치하여 적이 가까이 범해 오면 일시에 모두 발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호(壕) 안에다 만들기 때문에 적이 감히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항복 등에게 이르기를,

"대신이 내려가는 것에 대해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병조 참의 심충겸(沈忠謙) 【인아(姻婭)라는 것으로 발탁되었는데 어리석으면서 제멋대로 하고 권세를 탐하고 세력을 좋아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므로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했다. 】 아뢰기를,

"옛부터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대신이 전제(專制)한 다음에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신이 하삼도(下三道)501) 에 내려가 각 고을들을 지휘하기를 송(宋)나라 때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한 것처럼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찌 멀리 비변사에 앉아서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도원수(都元帥)가 하삼도를 전제하고 있으니 잘 조처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없겠습니까. 대신이 내려간다 하더라도 신은 과연 일에 도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유 총병(劉總兵)의 자문(咨文)에 언급한 일을 모두 시행하지 못했으니 우선 대신을 보내어 그의 뜻에 답변을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하삼도를 도원수에게 전담하여 지휘하게 했으니 책임이 무겁지 않은 것이 아닌데, 도원수가 군율을 쓰지 않음으로써 해이해지게 만들었다. 반드시 대신이 내려가 절제(節制)하되 명을 어긴 것이 극심한 자 1∼2인을 효시(梟示)한 다음에야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것이 어찌 도원수만의 과실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사세는 마치 가난한 가정에서 갑자기 존귀한 손님을 만나 창황 전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헤아려 보지 않고 무능하다고만 책망하는 것은 안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심충겸은 아뢰기를,

"신묘년502) 조(條)의 공물(貢物)은 이미 견감했습니다. 임진년 조는 또한 의정(議定)하여 빠짐없이 작미(作米)했는데도 수량이 많지 않으니, 계사년 조도 작미한 다음에야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물을 남김없이 작미한다면 백성들의 원망이 없겠는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전세(田稅)와 작미한 수량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계미년 조를 당겨 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신 이하가 아뢰기를 마치고 나갔다. 심충겸이 다시 들어와 아뢰기를,

"이른바 ‘계사년 조를 작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인데 이미 가을과 겨울에 민간에 거두어 모아 놓았습니다. 옛적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둔전(屯田)을 하여 군량을 보충했었으니, 제갈양(諸葛亮)위빈(渭濱)503)조충국(趙充國)금성(金城)504) 이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탕패한 나머지 군량을 조달할 길이 없으니 반드시 둔전을 만든 다음에야 조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방의 땅 중에 비옥(肥沃)하기가 재령(載寧)의 둔전만한 데가 없으니 병사(兵使) 조인득(趙仁得)에게 전달하여 조처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 듣건대 인천(仁川) 자연도(紫烟島)에 있는 목장에 말이 겨우 1백여 마리 뿐이라고 하니 말을 한 구석으로 몰아 붙이고 둔전을 만들게 하는 것이 또한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둔전을 만들자는 뜻은 아름답지마는 우리 나라는 중국과 다르다. 병사나 수사가 단지 수백 명의 잔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무슨 군사를 가지고 둔전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시언(李時彦)이 아뢰기를,

"심충겸이 아뢴 말은 모두가 그릅니다. 소신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민간의 사정을 대강 알고 있는데, 세전(歲前)에는 봉납하려고 해도 사세가 할 수 없습니다. 임진년 조는 이미 봉납했지만 계사년 조까지 봉납하게 되면 백성들이 반드시 원망하여 배반하게 될 것입니다. 황해도의 인심을 잃게 된 것은 둔전 때문이니 이제 다시 할 수 없습니다. 당금의 급선무는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다시 도산(逃散)한다면 어떻게 군사를 조발(調發)할 수 있겠습니까. 도성(都城) 백성도 사망한 사람이 매우 많아 보기에 참혹하고 측은합니다. 도성이 이러하니 외방(外方)은 알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목장 등의 땅을 백성을 모집하여 농사짓게 하여 절반은 지은 자가 먹게 하고 반은 관(官)에서 취한다면 군민(軍民)을 역사시키는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심희수·이시언이 아뢰기를,

"환도(還都)한 지 한 달이 되어 가는데도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지 않으셨습니다.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들을 어찌 초기(草記)505) 만 가지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기모(奇謀)나 이책(異策)이 없다 할지라도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으면 하정(下情)이 상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경연에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오늘처럼 인접하시면 좋겠습니다. 옥당(玉堂)이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상하번(上下番)들을 더러 야대(夜對)506) 하시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임금답지 못하지만 어찌 기모나 이책이 없다 하여 인접하지 않았겠는가. 마침 요사이 감기가 들어 기력이 지탱할 수 없겠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4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12면
  • 【분류】

    가족-가족(家族) / 재정-공물(貢物) / 인사-선발(選拔) / 농업-전제(田制) / 왕실-행행(行幸) / 군사-관방(關防)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역사-고사(故事) / 과학-화학(化學)


  • [註 495]
    기미(羈縻) : 직접 통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말함.
  • [註 496]
    삼령 오신(三令五申) : 세 번 명령하고 다섯 번 거듭 신칙하는 것으로 곧 지휘관이 몇 번이고 알리어 경계시키는 것.
  • [註 497]
    사명(辭命) : 외교문서.
  • [註 498]
    방납(防納) : 공물(貢物)을 공납(貢納)할 의무자가 바치기 어려울 경우 중간 상인이 의무자를 대신하여 바치고 그 대가를 받는 것. 그러나 부당한 이익을 노리는 폐단이 있었음.
  • [註 499]
    목전(木箭) : 나무로 만든 화살.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때에 사용하였음.
  • [註 500]
    추인(芻人) : 허수아비.
  • [註 501]
    하삼도(下三道) :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
  • [註 502]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 [註 503]
    제갈양(諸葛亮)의 위빈(渭濱) : 제갈양이 사마의(司馬懿)와 위남(渭南)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군량의 부족을 염려하여 군사를 나누어 둔전을 경영, 장기적으로 주둔할 계책을 세운 것을 말함. 《삼국지(三國志)》 제갈양전(諸葛亮傳).
  • [註 504]
    조충국(趙充國)의 금성(金城) : 조충국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무장(武將). 중국을 침략해 온 오랑캐를 치기 위해 금성(金城)에 들어가서 둔전(屯田)을 경영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성공한 일이 있음.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전(趙充國傳).
  • [註 505]
    초기(草記) : 상주문(上奏文)의 한 가지. 각 관아에서 정무(政務)의 사항에 관하여 간단하게 요지만 기록하여 올리는 문서.
  • [註 506]
    야대(夜對) : 밤에 경연관(經筵官)들을 불러 경사(經史)와 시정(時政)에 대해 강독하고 논사(論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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